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영향 (문단 편집) == 긍정적 결과 == 사실 이것도 전쟁이 없었으면 나오지 않았다기 보다는, 전쟁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북한에서는 6.25 전쟁과 그 전쟁 이전의 안 좋은 점을 모두 이용한 최악의 사회상이 펼쳐졌다. 가령 신분이 낮은 사람만을 출세시켜서 이들에게 숙청을 맡겨서 독재 기반을 공고히한다든가, 6.25를 빌미로 사회가 더욱 군국주의적으로 변하고, 과거에는 생각도 못했던 지역별 이동을 막아 남한 출신 좌익이 지역 문화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적화통일]]의 명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강요받으며 지역별 폐쇄성이 강해지는 식으로 말이다. 특히 [[평안도]] 같은 지역은 새로 개척된 곳이라 신분 차별이 적었다고 하는데, 북한 정권은 전쟁 전 분단 직후에도 빈부격차 같은 어떻게든 이간질할 거리를 찾아내서 권력 강화에 몰두하며 그 지역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좌익과 우익의 분포가 과거에는 경상도가 좌파가 많고, 평안도가 우파가 많다는 것이 북한과 남한으로 갈라지고 정치 성향에 따라 월남과 월북이 이어지며 정치 극단화가 심화되었다. 상업이 조선에서 가장 발달한 부류의 도시에 속하던 [[평양]]은 북한에 의해 분단 전에는 '비문화적이고 기형적인 상업도시'였던 곳으로 폄하되었다. 신분 차별의 경우에도 문벌의 경우 1800년대 초반 [[홍경래의 난]]이나 그후 [[갑오개혁]] 등을 통해 타파하려는 노력이 강했고, 그 결과 왕실과 연줄이 있기는 했어도 변방 함경도 출신 보부상 [[이용익]]이 재정을 관리하는 부서인 탁지부에서 가장 높은 대신 등을 맡기도 했다. 아예 과거제 폐지 같은 강경한 조치도 이미 존재했다. '양반' 같은 명칭이 단순한 대명사가 된 것도 6.25 전쟁 이전이다. 일제강점기에도 [[형평운동]]처럼 백정 등을 중심으로 신분차별 타파의 노력이 이어졌다. 심지어 [[카스트]]의 인도에서도 IT분야나 정치 분야 등을 중심으로 계급해체 노력이 있듯, 거상 [[임상옥]]의 노력처럼, 영국처럼 과거의 신분 제도는 있기는 하나 아예 [[비틀즈]] 같이 노동계급이라도 귀족보다 잘 나갈 정도로 돈이 중요한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영국의 경우 고위 신분이 오래도록 견제를 심하게 받아 [[군주제]]를 폐지하자는 발언이 가능하고, 국왕에게 계란을 던져도 벌금만 낸다.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2023/01/16/ANJGNTRDQVDU3EO2SOATLBK3GY/|#]] [[머슴]]의 경우 아예 60년대가 되면서 산업화로 도시에서 노동자로 변모하며 사라진 것이다. 지역별 문화도 분단 이전엔 많이 섞여가 북한 쪽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황해도 이남의 본관을 갖고 있었고, 유한양행의 [[유일한]]처럼 조상은 경상도 출신인데 경제적 기회를 찾으며 조상이 건너간 평안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일을 하던 사례도 있다. 심지어 600년전에도 이미 함경도 태생의 태조 이성계는 황해도에서 태어난 [[신덕왕후]]를 왕비로 삼고, 신덕왕후 자체도 모계는 고구려계 성씨인 경상도 진주가 본관인 [[진주 강씨]] 집안이었다. 이제는 1930년대의 현대그룹의 [[정주영]] 마냥 함경도, 금강산, 서울 등지를 넘나들며 일을 하는 것이나, [[백석(시인)|백석]]처럼 평안도 사람이 경상도 통영을 사랑하는 시를 짓거나,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내'라는 시처럼 함경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에게 사투리를 가르쳐준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심지어 남한에서는 '~니?'라고 묻는 식의 함경도쪽 문화를 접한 사람은 영화의 영향으로 조선족 문화냐며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